한껏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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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 3. 26.

    by. 뿌듯한 하루

    목차

      1. 텍스트는 홀로 존재할 수 있는가?

      우리는 종종 문학 작품을 하나의 자립적이고 독창적인 창작물로 여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어떤 문학도 완전히 새로운 말, 완전히 새로운 서사를 담고 있을까?
      **인터텍스추얼리티(intertextuality)**는 바로 이런 전제를 의심한다. 이 개념은 ‘모든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와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는 관점이다. 즉, 문학 작품은 항상 다른 문학, 다른 이야기, 다른 담론과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이 개념은 프랑스의 문학이론가 **쥘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가 1960년대 바흐친의 ‘대화성’ 개념을 확장하며 처음 제안했다. 크리스테바는 "모든 텍스트는 과거의 텍스트들을 흡수하고 변형한다"고 말했다. 이는 창작이란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의미들을 조합하고 재배열하는 행위라는 뜻이다. 결국 한 작품의 의미는 그 자체에 고정되지 않고, 얼마나 넓고 복잡한 대화 속에 놓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2. 문학은 끝없는 ‘참조의 숲’을 거닌다

      소설, 시, 희곡 등 다양한 문학 형식은 언제나 다른 작품들을 암시하거나 인용하거나 대립하거나 한다. 『햄릿』의 주제는 수많은 현대 작품에 다시 등장하고, 『신곡』이나 『성서』는 셀 수 없이 많은 문학작품 속에서 변형되고 재해석된다. 이러한 맥락을 독자가 인식할수록 작품의 의미는 더 풍성해진다.
      문학은 폐쇄된 공간이 아니라, 텍스트들이 끊임없이 서로 교차하고 충돌하는 거대한 ‘참조의 숲’이다.

      예를 들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완전히 다른 시공간으로 옮긴 텍스트다. 더블린의 평범한 하루를 고대 신화와 병치하면서, 현대적 삶의 신화성을 되묻는 인터텍스추얼한 실험을 보여준다. 반대로, 『오디세이아』에 대한 독자의 이해가 없다면 『율리시스』의 많은 층위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또한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는 남부 고딕 문학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사회적 리얼리즘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처럼 모든 문학은 자신이 뿌리내린 문학 전통과 대화하며 의미를 확장하거나 전복한다.

       

       

      모든 문학은 인용이다: 인터텍스추얼리티와 문학의 관계망

       

      3. 표절인가 창작인가: 경계의 미묘함

      인터텍스추얼리티는 때로 오해를 낳기도 한다. 어떤 독자는 과거 작품을 인용하거나 재해석한 작품을 ‘표절’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인터텍스추얼한 문학은 모방이 아니라 대화이다. 그것은 기존 텍스트에 질문을 던지고, 다른 방식으로 답하거나, 전혀 다른 맥락으로 옮겨놓음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창출한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페넬로피아드』는 『오디세이아』 속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의 시각에서 원작을 재서술한다. 이 작품은 원작에 대한 비판이자 확장이다. 이는 단지 원작을 ‘따라한 것’이 아니라, 주체를 전환하여 서사를 재구성한 창작적 대화라고 할 수 있다. 현대 문학은 이런 방식으로 기존 이야기의 권위를 해체하고, 새롭게 질문하며, 더 다양한 목소리를 끌어들인다.

      한편, 인터텍스추얼리티는 단지 명시적인 인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모티프, 주제, 서사 구조, 심지어 장르 코드 자체도 상호텍스트적 자산이다. 그러므로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라는 개념은 허상에 가깝다. 중요한 건 얼마나 창의적으로 다른 텍스트와 대화하는가이다.

       

       

      4. 독자는 해석자가 아니라 공동 창작자다

      인터텍스추얼리티 개념은 독자의 역할도 완전히 바꿔놓는다. 텍스트는 단지 작가의 창작물이 아니라, 독자가 읽고 해석하는 순간부터 비로소 의미를 완성한다. 특히 텍스트가 다른 문학을 참조하고 변형할 때, 독자는 그 연결고리를 인식하고 ‘해석’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공동 창작자가 된다.

      바흐친은 어떤 텍스트도 단일한 목소리(monologic)가 아닌, **다중의 목소리(polyphonic)**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했다. 문학 작품은 수많은 텍스트, 수많은 담론과 대화하며 의미를 만들어낸다. 독자는 이 복잡한 대화 속에서 스스로 ‘의미의 조율자’가 된다.

      이처럼 인터텍스추얼리티는 문학을 고립된 창작물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연결되고, 해석되며 다시 쓰이는 살아 있는 문화적 유기체다. 그리고 그 유기체 안에서 독자 역시 텍스트의 일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