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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문학 속 현실은 ‘사실’이 아니다
문학에서 ‘현실’이라는 말은, 우리가 일상에서 말하는 현실과 다르다.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이나 사회적 사실을 묘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감정, 관념, 기억, 상상까지를 포괄하는 더 넓은 의미의 현실이다. 이 점에서 문학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거울’이 아니라, 특정한 시각으로 현실을 재구성하는 프리즘에 가깝다.
러시아 형식주의자 슈클롭스키는 문학의 기능을 “낯설게 하기(ostranenie)”라고 말했다. 문학은 우리가 익숙하게 생각하는 현실을 낯설게 만들고, 그 틈으로 진실에 접근하게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에서 그레고르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벌레’가 되어 있다. 이는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환상이지만, 그 환상을 통해 ‘가족 내 역할과 인간 소외’라는 현실의 본질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문학은 거짓을 말하면서도 진실에 닿는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환상, 이것이 문학이 현실을 ‘재구성’하는 방식이다.
2. 환상은 현실을 왜곡하는가, 비추는가?
많은 이들이 환상을 현실 도피라고 생각한다. 특히 소설이나 시에서 마법, 환영, 비현실적 세계가 등장할 때면 “현실적이지 않다”는 평가가 따르곤 한다. 그러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현대 사회 자체가 ‘시뮬라크르’(Simulacra), 즉 복제된 현실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현실이란 이름 아래 존재하는 것들—미디어, 광고, 권력 구조—는 이미 ‘재현된 것’에 불과하며, 진짜 현실은 오히려 가려져 있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문학 속 환상은 현실을 왜곡하기보다는 현실의 허위를 벗겨내는 장치로 작동한다. 예를 들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은 마을 전체가 기억을 잃거나 하늘로 떠오르는 장면 등 비현실적인 사건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식민주의, 독재, 역사적 망각 등 라틴 아메리카 현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환상은 오히려 현실을 ‘더 진실되게’ 말하는 언어가 된다.
환상이 곧 현실을 해체하거나 왜곡한다고 보기보다는, 문학은 환상을 통해 현실을 재배열하고 질문한다. “우리가 아는 현실이 진짜인가?” 하고 말이다.
3. 환상 문학은 사회비판의 가장 강력한 무기다
문학은 종종 직접적인 현실 고발보다, 환상을 매개로 사회 비판을 수행하는 전략을 선택해왔다. 조지 오웰의 『1984』는 가상의 전체주의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그 환상적 설정은 독자로 하여금 오히려 자신의 현실 사회와 정치 구조를 낯설게 보게 만든다. 과장된 허구는 현실의 어둠을 더 선명하게 비춘다.
이와 유사하게, 알도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기술과 쾌락에 도취된 미래 사회를 묘사하며, 인간 자유와 정체성의 문제를 조명한다. 이 작품들은 모두 비현실적인 배경을 가졌지만, 그 안에 있는 질문은 철저히 현실적이다. 환상은 도피가 아니라, 가장 정면으로 현실을 응시하는 방식이다.
이런 문학적 환상은 현실을 비판하는 동시에, 다른 현실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유토피아나 디스토피아적 설정은 현재 구조를 상대화시키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질문을 던진다. "꼭 이렇게 살아야 하나?", "이 구조가 유일한가?" 문학은 환상 속에서, 현실 너머를 상상하는 힘을 부여한다.
4. 독자는 환상과 현실 사이에서 ‘재구성자’가 된다
문학은 저자 혼자 완성하지 않는다. 독자가 개입하면서, 현실과 환상은 더욱 복잡하게 얽힌다. 독자는 환상을 읽으며 자신의 현실을 반추하고, 자신의 현실로 환상을 해석한다. 이처럼 문학 속 현실은 언제나 독자의 경험과 시선에 따라 달라진다. 같은 작품을 읽어도 누군가는 그것을 환상으로, 다른 이는 그것을 현실에 대한 은유로 받아들인다.
철학자 폴 리쾨르는 서사적 정체성(narrative identity)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인간은 자신을 이야기로 이해한다고 했다. 문학은 이 서사를 제공하고, 독자는 그 서사를 자신의 기억, 경험, 감정과 연결 지으며 현실을 ‘다시 구성’한다. 즉, 문학은 독자에게 ‘자신만의 현실을 창조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결국 문학은 현실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현실을 어떻게 다시 말할 수 있는지, 혹은 다른 방식으로 살아볼 수 있는지를 묻는 철학적 실험실이다. 환상은 현실의 부정이 아니라, 현실을 더 정교하게 마주하는 길일 수 있다. 문학은 언제나 현실을 재구성해왔다. 그리고 그 재구성의 흔들림 속에서, 우리는 ‘지금 이 세계’의 균열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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