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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소설 속 화자는 진실을 말하는가?
우리는 소설을 읽을 때, 종종 ‘이야기’를 사실처럼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화자’는 정말 믿을 수 있는 존재일까? 문학에서 화자는 단순한 전달자가 아니다. 그는 서사의 주도권을 쥐고, 사건을 해석하고, 때로는 거짓을 말하거나 감춘다. 따라서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단지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화자라는 ‘자아’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해석하는 과정이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인간의 주체성 자체가 사회적 담론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즉, 우리가 믿는 ‘나’라는 존재는 이미 외부 구조에 의해 형성된 자아다. 이러한 관점은 문학 속 화자에게도 적용된다. 그는 완전하고 투명한 존재가 아니라, 특정한 관점, 맥락, 목적 아래 구성된 자아다. 따라서 화자의 말은 항상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이처럼 소설 속 자아는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너는 나를 믿고 있는가?” 소설은 독자로 하여금 진실과 거짓, 사실과 허구, 자아와 이미지 사이를 끝없이 의심하게 만든다.
2. 신뢰할 수 없는 화자, 그 불안한 이야기의 힘
‘신뢰할 수 없는 화자(unreliable narrator)’는 현대 문학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치 중 하나다. 그는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거나,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채 진실을 왜곡한다. 이런 화자의 등장은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들지만, 동시에 이야기의 깊이를 더하고 해석의 층위를 확장시킨다.
예를 들어,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에서 주인공 핍은 어린 시절의 감정과 판단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한다. 그는 때때로 어른의 시선으로 과거를 비판하지만, 여전히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를 오가며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 상태에 머문다.
또한, 『파이트 클럽』의 무명의 화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끝까지 감춘 채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독자는 화자의 시선을 그대로 따르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그가 말해온 세계가 일종의 환상 위에 세워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신뢰할 수 없는 화자는 단지 속이는 존재가 아니다. 그는 독자로 하여금 ‘현실이란 무엇인가, 자아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묻게 만드는 철학적 장치다.
3. 이야기 속 자아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우리는 이야기에서 자아를 본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야기를 통해 자아가 만들어진다. 폴 리쾨르(Paul Ricœur)는 인간은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서사’를 만든다고 말한다. 그는 이것을 ‘서사적 정체성(narrative identity)’이라고 불렀다. 내가 누구인지 설명할 때, 우리는 언제나 이야기의 형태를 빌린다. “나는 이런 일을 겪었고, 그래서 지금 이런 사람이야.”
이러한 자아의 서사적 구조는 문학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소설 속 인물은 자신의 삶을 정리하기 위해 이야기하고, 독자는 그 이야기를 따라가며 ‘그 인물의 자아’를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그 이야기가 언제나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제시된다는 것이다. 인물은 자신이 무엇을 믿고 기억하며 판단하는지를 설명하지만, 그 안에는 항상 빈틈이 존재한다. 그 틈이야말로 독자의 사유가 개입할 수 있는 공간이다.
따라서 문학 속 자아는 고정된 정체성이 아니라, 흐름 속에서 형성되고 해체되는 이야기의 결과물이다. ‘화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곧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이처럼 문학은 자아를 주어진 실체가 아니라 끝없이 생성되는 이야기로 제시한다.
4. 독자와 자아, 그리고 이야기의 윤리
화자가 신뢰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판단하는 과정은 단지 해석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거기에는 윤리적 차원도 개입된다. 만약 어떤 화자가 거짓을 말했지만, 그것이 그의 생존 방식이었다면? 혹은 기억의 왜곡이 그에게 상처를 견디는 방식이었다면? 우리는 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에서 주인공 레누는 친구 릴라의 삶을 글로 재구성한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릴라를 이해한다고 믿지만, 사실상 릴라의 삶을 ‘자신의 이야기’로 덮어쓴다. 독자는 그 글이 릴라의 진실인지, 레누의 재해석인지 끝내 확신할 수 없다. 이때 문학은 독자에게 질문한다: “당신은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문학 속 자아는 단지 개인의 정체성을 넘어서, 인간이 서로를 이해하려 할 때 마주치는 한계와 가능성의 이야기다. 이야기는 언제나 불완전하고, 자아는 언제나 누군가의 시선을 거쳐 구성된다. 그래서 문학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묻는다.
“너는 나를, 그리고 너 자신을 믿을 수 있는가?”'🧩 사유하는 세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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