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껏여유

온갖 유용한 정보를 안내해드리는 블로그입니다.

  • 2025. 3. 28.

    by. 뿌듯한 하루

    목차

      1. 번역은 가능한가, 아니면 불가능한 환상인가?

      “번역은 배신이다(Traduttore, traditore).”
      이탈리아 속담처럼, 번역은 흔히 ‘불가능한 예술’로 여겨진다. 특히 문학 번역은 단순한 언어의 치환이 아니라, 문화, 정서, 맥락까지 옮겨야 하는 복합적인 작업이다. 그렇다면 과연 문학은 번역될 수 있을까?

      언어철학자 벤야민은 「번역자의 과제」에서, 번역은 원문의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 언어’에 이르는 길이라고 했다. 이 말은 번역이 단지 내용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언어와 언어 사이의 보이지 않는 ‘사이’를 드러내는 작업이라는 뜻이다. 벤야민에게 번역은 충실한 복사본이 아니라, 원문과 병치되며 그 자체로 새로운 작품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번역은 단순한 ‘가능/불가능’의 문제가 아니다. 번역은 다르게 옮겨지는 방식으로, 원문의 잠재력을 새롭게 해석하고 펼쳐내는 일이다. 번역은 불가능하면서도 필연적인 행위다. 문학은 타인과 만나야 의미가 확장되며, 번역은 그 만남의 유일한 통로다.

       

      2. 문학은 언어 너머의 정서를 옮길 수 있는가?

      문학 번역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단어가 아니라 정서와 맥락이다. 언어는 단순한 정보 전달의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문화의 결정체이자, 감정의 그릇이며,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다. 그러므로 번역자는 단어만이 아니라, 그 단어가 ‘말해지는 방식’까지 옮겨야 하는 딜레마에 놓인다.

      예를 들어,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은 간결한 문장과 절제된 어조 속에 깊은 자조와 절망을 품고 있다. 이를 한국어로 번역할 때, 지나치게 번역투를 피하면 ‘맛’이 사라지고, 원문 그대로 옮기면 이질감이 생긴다. 어떤 단어를 어떻게 옮기느냐는 결국 ‘작가의 의도’보다 ‘번역자의 해석’이 개입된 결과물이다.

      또한, 시처럼 함축적이고 운율이 중요한 장르는 번역이 더 까다롭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 한 줄은 원어의 리듬과 모호함 속에서 수십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이를 다른 언어로 옮길 때, 무엇을 살리고 무엇을 포기할 것인지의 선택이 곧 번역의 본질이 된다.

       

      번역된 문학은 같은 문학인가? 언어, 의미, 그리고 세계의 문제

       

      3. 번역된 문학은 원작과 동일한 예술인가?

      이 질문은 문학이 언어를 통해서만 존재하는가, 아니면 언어를 넘어선 무언가를 담고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만약 문학이 단지 언어의 배열이라면, 번역은 항상 ‘열화된 복제물’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문학이 인간의 감정, 사고, 존재의 문제를 언어 너머로 탐색하는 예술이라면, 번역은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재현하는 ‘또 다른 창작’이 된다.

      하루키는 자신의 소설이 영어로 번역될 때, 자신이 쓰지 않은 리듬과 분위기가 느껴진다고 말한 바 있다. 이는 번역이 작가의 손을 떠난 이후에도 또 다른 ‘독립된 문학’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증거다. 번역자는 단순한 중계자가 아니라, 해석자이자 공동 창작자로 이해되어야 한다.

      게다가 독자 입장에서는, 대부분의 세계문학은 번역을 통해 만나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에게 『도스토옙스키』, 『보르헤스』, 『카프카』는 이미 번역된 상태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작품들에서 문학의 깊이를 경험한다. 번역은 다르지만, 동일한 감동과 사유를 가능하게 한다.

       

      4. 번역은 ‘같음’을 추구하는가, ‘다름’을 존중하는가?

      번역의 궁극적인 윤리는 ‘같게 만드는 것’일까, 아니면 ‘다르게 드러내는 것’일까?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번역이란 원본을 대체하거나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원본을 끝없이 지연시키고 재해석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번역이 원문을 "복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원문과의 긴장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생산해낸다는 뜻이다.

      번역은 ‘문화 간 소통’을 가능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차이를 드러내는 작업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서구의 성경 번역은 아프리카나 아시아 문화권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다시 쓰인다. 번역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행위가 된다. 어느 단어를 선택하고, 어떤 맥락을 생략하느냐에 따라 문학은 전혀 다른 목소리로 독자에게 말을 건다.

      이 점에서 번역은 단순한 ‘언어의 다리’가 아니라, 문학과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끊임없는 협상이다. 번역은 ‘같음’을 재현하려 애쓰기보다, 다름을 이해하고 조율하는 작업이어야 한다. 문학은 번역됨으로써 더 넓어지고, 번역을 통해 더 많은 질문을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