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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혐오의 철학 5편] 혐오를 넘는 사유 – 공감 대신 책임이라는 윤리
📢 혐오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사유해야 할까요? 공감이 아닌 책임의 윤리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혐오에 맞서기 위해선 공감이 필요하다’는 말은 자주 듣습니다. 하지만 철학은 묻습니다. 공감만으로 충분한가? 아니, 오히려 공감이 불가능한 순간이야말로 윤리가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본 글은 레비나스, 아렌트, 버틀러의 사유를 바탕으로 혐오를 넘는 윤리적 사유의 가능성을 모색합니다.
레비나스: 타자 앞에서의 책임
레비나스에게 윤리란 '타자 앞에서의 무조건적인 책임'입니다. 그는 타자를 이해하거나 동의하는 것이 아닌, 타자의 존재 그 자체를 받아들이고 그에 반응하는 것이 윤리라고 보았습니다. 특히 그는 ‘타자의 얼굴’이 나에게 책임을 요구한다고 말하며, 공감보다는 책임이 윤리의 핵심이라고 강조했습니다.
✅ 타자의 윤리와 혐오를 넘는 사유, 아래 글에서 다시 만나보세요.
👉 2편: 레비나스와 타자 – 불편한 존재를 마주할 용기아렌트: 생각하지 않는 악, 무사유의 위험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통해 악이 거대한 악마가 아니라,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일어난다고 보았습니다. 그녀는 "타자에 대한 사유의 부재"가 집단적 혐오와 폭력을 낳는다고 경고했습니다. 혐오를 넘기 위해선 타자에 대해 사유할 용기, 스스로 질문할 능력이 필수적입니다.
버틀러: 취약성과 인정의 윤리
주디스 버틀러는 모든 인간은 '취약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취약성은 인간을 동등하게 만드는 출발점입니다. 그는 사회가 특정 집단의 상실은 애도하고, 다른 집단의 상실은 무시하는 ‘애도의 불균형’을 지적했습니다. ‘인정받을 수 있는 삶’과 ‘말해질 수 없는 존재’ 사이의 불균형은 혐오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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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편부터 보기 – 혐오의 철학 시리즈혐오 이후, 무엇을 말할 것인가
공감은 때로 한계를 가집니다. 나와 너무 다른 존재, 이해할 수 없는 타자 앞에서 우리는 멈추게 됩니다. 하지만 철학은 그 지점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이해보다 먼저 책임이 있고, 동의보다 앞서 응답이 있습니다. 혐오를 넘는다는 것은 결국 타자에 대한 책임의 감각을 다시 회복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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