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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의 철학 2편] 레비나스와 타자 – 불편한 존재를 마주할 용기
📢 타자와 마주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철학자 레비나스의 관점을 통해 함께 사유해봅니다.
혐오는 종종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한 반응으로 발생합니다.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이 ‘타자’와의 관계를 윤리의 출발점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인간이 타자를 마주할 때 느끼는 불편함, 낯섦, 긴장감이 오히려 인간다움의 핵심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타자를 배제하려 하고, 그 불편함을 제거하려 할까요?
타자는 나의 거울이 아니다
현대 사회는 타인을 자꾸 ‘나처럼’ 만들려 합니다. 동일화의 충동은 안전해 보이지만, 사실상 타자의 고유성을 지우는 폭력일 수 있습니다. 레비나스는 “타자는 결코 나와 같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는 타자와의 ‘거리’ 자체를 윤리의 공간으로 보았고, 이 불가해한 존재 앞에서 느끼는 책임감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 타자성과 윤리, 우리의 일상에서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 철학과 타자성 – 낯섦의 가치타자를 만난다는 것의 의미
레비나스에게 타자를 만난다는 것은 단순히 사회적 만남이나 공존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는 ‘타자의 얼굴’이라는 개념을 통해, 타자가 나에게 말을 거는 존재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 얼굴은 나의 자유를 제한하고, 나에게 책임을 요구합니다. 즉, 타자는 내가 중심이 되는 세상에 ‘타격’을 주는 존재입니다.
불편함, 그 자체가 윤리다
우리는 흔히 타자에 대한 불편함을 ‘극복해야 할 장애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그 불편함이야말로 윤리적 사유의 시작점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진짜 윤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혐오의 감정을 억누르는 것과는 다릅니다.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 혐오를 넘어서기 위한 철학, 더 알고 싶다면?
👉 1편: 우리는 왜 타인을 배제하는가?타자를 받아들인다는 것의 용기
결국 레비나스가 말하는 윤리는 타자를 바꾸려는 시도보다, 나 자신이 변화하는 것을 요구합니다. 타자와의 관계는 불안정하고 모호하며 때로는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진정한 인간다운 사유와 책임을 배웁니다. 혐오를 넘어서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이해가 아니라 ‘감당’일지도 모릅니다.
📌 다음 편 예고
3편 예고: 푸코와 규범 – 혐오는 어떻게 관리되는가
혐오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사회가 관리하는 ‘규범적 장치’임을 탐구합니다.🔗 시리즈 다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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